【건강다이제스트 | 정유경 기자】
【도움말 | 서울가정문제상담소 김미영 소장】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말이 있다. 같은 행동을 해도 타인은 엄격한 잣대로 보고 자신은 관대하게 볼 때 주로 쓴다. 이런 잣대가 또 있다. 집착이다. ‘내가 하면 사랑이고 남이 하면 집착’이라는 식이다. 사랑이라는 탈을 쓴 집착의 결말은 비극적일 때가 많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불행으로 내몬다. 부부를 멀어지게 만드는 집착의 굴레, 그 민낯을 들여다본다.
결혼 3년 차 박진원 씨(가명)는 아직 아이가 없지만 3살 아이를 키우는 심정으로 살고 있다. 박 씨에게 아내는 엄마 품에서 안 떨어지는 아이 같은 존재다. 아내는 언제나 박 씨와 함께하길 바란다. 아내는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을 빼고는 항상 붙어 있어야 한다고 우긴다. 혼자 나가려고 하면 온갖 핑계로 못 나가게 하거나 같이 따라나선다. 결혼한 후부터는 총각 때부터 하던 조기 축구도 끊었다. 친구 모임에 아내가 자꾸 따라오려고 해서 따돌린 적도 있다.
사실 연애할 때도 아내는 이런 조짐을 보였다. 그냥 아는 여자와 대화 한마디 하는 것도 싫어했다. 매일 일거수일투족을 꼬치꼬치 말해주길 바랐다. 그때는 ‘나를 얼마나 좋아하면 그럴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름다운 구속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결혼해 보니 수갑만 안 찼을 뿐이지 그냥 구속이었다. 자신이 운동을 싫어한다고 박 씨까지 운동하러 못 나가게 하는 것은 정말 화가 났다. 결혼 전까지만 해도 아이를 빨리 갖고 싶었는데 이젠 아이가 엄마를 닮을까 봐 걱정된다. 이렇게 아무것도 못 하게 묶어놓을 거라면 이혼하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지만 오늘도 참는다.
돈 잘 벌고, 능력 있는 아내를 둔 40대 직장인 황천석 씨. 황 씨는 직장에 다니는 아내가 못마땅했다. 이유는 아내가 일 때문에 만나는 많은 남자 때문이었다. 아내는 황 씨가 남자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싫다고 해도 그만두지 않더니 최근에는 승진까지 했다.
황 씨는 자신보다 젊고 예쁘고 잘 나가는 아내가 늘 불안했다. 회사에 아내 또래 남자직원이 많은 것도 신경 쓰이고, 거래처 직원이 대부분 남자인 것은 더 싫다. 한 번은 아내의 회식 날 회사 동료가 집까지 택시로 데려다주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대판 싸웠다. 결국 아내가 다시는 남자와 함께 택시를 안 타기로 약속한 것으로 싸움은 일단락됐지만 회식의 회자만 들어도 치가 떨린다. 그 후로는 아내가 회식을 끝내고 집에 올 때까지 다른 남자와 스킨십을 하는 상상을 하는 등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아내를 기다리다 못해 회식자리를 찾아가기도 여러 번이었다.
며칠 전 아내가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했다. 당분간 아이와 함께 친정에서 생활한다는 것이었다. 황 씨의 집착 때문에 숨이 막혀 못 살겠다는 말을 했다. 억울했다. 다 아내를 사랑해서 한 일이었다. 아내와 따로 사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아내 주변의 그 많은 남자를 감시해야 했다. 황 씨는 아내가 당장에라도 자신을 떠날 것 같아 괴롭다.
사랑은 이타적이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기쁘다. 부부 사이라면 배우자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다.
집착은 이기적이다. 자기만족을 위해 주기보다 받기를 바란다. 배우자가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줬으면 좋겠다.
간혹 집착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집착의 고통을 경험하면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착각인지 깨달을 것이다.
서울가정문제상담소 김미영 소장은 “집착은 타인을 통제하려는 욕망의 표현이지 온전한 사랑은 아니다.”고 말한다. 집착하는 사람은 상대를 통제해야 사랑받고 있다고 느낀다. 배우자가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하고 자율성을 침해하고 방해한다.
문제는 이렇게 집착해도 막상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중독된 것처럼 잠시 편안해질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배우자가 모든 기대를 채워줄 수 없어 더욱 고통스러워진다. 집착하는 배우자는 분리불안을 느끼고 심한 경우 의처증이나 의부증, 편집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집착을 당하는 배우자는 새장에 갇힌 느낌을 받는다. 집착에 지친 배우자는 배우자에게서 더욱 멀어지려고 한다. 화병을 얻거나 이혼을 꿈꾸기도 한다. 또한 배우자의 집착이 계속되면 새장의 새가 문을 열어주어도 날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학습된 무기력’으로 성격이 소극적으로 변하고 분노를 억압해 만성 우울증을 겪기도 한다.
집착하는 배우자는 자신이 배우자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흔하다. 배우자는 집착이라고 항의해도 자신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내 사랑이 집착인지 사랑인지 분별해보는 방법이 있다. 다음의 5가지 상황에 해당하는 점이 많다면 당신은 사랑이 아닌 집착에 빠져 있을 수 있다.
1. 나는 사랑하는데 배우자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진다.
2. 배우자가 늦게 들어오면 누구와 함께 있었냐고 추궁한다.
3. 배우자의 사생활을 몰래 파헤치려고 한다.
4. 배우자의 욕구와 감정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배우자의 행동과 감정을 통제한다.
5. 배우자의 대인관계, 사회생활 등에 불안을 느끼고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배우자에게 집착하고 있을지라도 너무 자신만 탓하지는 말자. 집착의 원인은 보통 어린 시절 부모와의 안정적인 애착 부족, 모성 결핍 등으로 안정된 경험이 부족해서 나타나는 일이 흔하다. 이러한 결핍을 메우기 위해 더 강한 집착을 하게 되고 이후 성인이 되면 사람, 행동, 물질 등 특정한 대상에 집착하게 된다.
김미영 소장은 “집착은 결핍된 성장으로 인해 낮은 자존감, 열등감, 상대방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할 거라는 불안, 피해의식 등에서 시작된다.”며 “강한 집착을 보이는 것은 그 대상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고 여기지 못한다.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본능적으로 특정 대상에게 집착하는 것이다.
집착 때문에 멀어진 부부 사이라면 그 집착의 끈을 놓는 것만으로 가까워질 수 있다. 그 방법을 알아본다.
배우자가 의심할 때는 제대로 해명을 하는 것이 좋다. “그래, 나 여자 만났다! 됐어?” 이런 식의 반응은 더욱 집착하게 한다.
배우자의 불안을 이해해준다. 함께하는 시간을 늘려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을 준다.
“난 세상에서 당신이 제일 좋아!” “영원히 사랑해!”와 같이 사랑을 말로 표현한다.
부부의 아름다운 미래를 함께 설계해 떠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준다.
집착을 유발하는 불안을 끄집어내서 직면하고 그 불안이 아직 벌어진 일이 아님을 인정한다.
지나친 의존과 환상적 기대에서 벗어난다. 배우자가 어떻게 해주든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 돼야 한다.
배우자라고 해도 내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줄 수도 없고, 해줄 의무도 없다. 배우자가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더라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정유경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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